2005년 이루어진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조사 결과 늦어도 16부터는 백자제작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1423~1432년에 기록된 世宗實錄地理志 (세종실록지리지) 慶尙道 安東大都護府 靑松郡條(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청송군조)에서 청송군이 백토의 산지임을 기록하고 있어, 이미 166 이전에 백자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c말부터 20c 중반에 가장 활발하게 생산, 유통되었던 청송백자는 질 좋은 도석을 바탕으로 1920~1930년대에는 일본각지로도 활발하게 판매되었으며, 특히 동경의 트商店(현재의 미스코시 백화점)으로도 수출될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다.
1958년 공업용 대량생산 제품의 출현으로 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청송백자는 청송군의 발굴 복원사업과 2009년 청송백자전수관의 개관을 통해 다시 세상에 드러났으며 현재청송백자 전수자들과 현대인의 다양한 식생활에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디자인의 생활자기를 제작하며 대한민국 명품생활자기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500년 전통의 청송백자”의 전통과 기술을 전수받아 현대적인 작품으로 계승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있습니다.
오늘도 “청송백자의 뛰어난 가치”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 故 고만경 옹(1930~2018)은 청송 부남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열다섯 되던 해 부남면 화장리 웃화장 공방에 입문하여 남촌어른으로부터 사기제작 기술을 전수 받으며 청송백자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사기제작기술을 배운지 3년 뒤인 1947년 한소밭골 공방을 시작 으로 설티, 웃화장, 질티, 법수 등에서 사기대장으로 일하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발, 대접, 접시 등의 백자를 만들었고, 후에 가족과 함께 직접 공방을 운영하게 되었다.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기능적으로, 인격적으로 완숙한 장인의 경지란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절감한 고만경 옹은 고된 노력과 끊임없는 연구 끝에 자신만의 비법을 축적하며 가장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기능을 연마하여 원숙한 청송백자 사기대장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그러나 1958년 공업용 대량생산 제품의 출현으로 인해 고만경 옹은 더 이상 사기대장으로서 작품을 생산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공방은 문을 닫게 되었지만, 고만경 옹은 대구 포항 등지를 돌며, 생활을 하면서도 청송백자의 맥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열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힐 뻔 했던 청송백자의 존재는 2007년 시작된 청송백자 발굴사업으로 재조명되어 2009년 청송백자전수관을 개관하고, 청송군에서 청송백자 제작에 가장 중요한 기술을 가진 고만경 옹을 다시 모셔오면서부터 전동 제작방식에 따라 복원작업을 하며 청송백자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나갈 수 있었다.
고만경옹은 5백년 전통을 계승한 유일한 사기장으로서 청송백자의 발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청송백자의 제작기술을 후대의 전수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장인의 혼을 불태웠다.